우리문화의 수수께끼

괜찮다고 말하지만 괜찮지 않은 너와 나, 우리가 안고 사는 우울. 그리고 그 감정이 가져온 마음의 병 우울증. 화제의 채널



여성 성인만화의 새로운 경지

담담한 일상을 흔드는 설렘과 공감의 이야기





평범한 직장인 그녀는 섹스중독입니다

스물여덟의 평범한 직장인 우희는 섹스중독이다. 남자에게 상처받고 회사에서 도망치듯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내면의 공허함과 관계에 대한 갈증을 풀지 못해 채팅으로 남자를 찾는다. 낮에는 새로 취직한 서점에서 책을 판매하며 동료들과 소소한 일상을 이어가지만 밤에는 낯선 남자들과 자폐적인 관계를 이어가는 우희. 하룻밤 쾌락은 위험한 만큼 달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 불안을 느낀다.

?말하기엔 사소한?은 사랑에 배신당한 뒤 섹스중독에 시달리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순정만화이다. 대상화되지 않은 여성이 스스로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특별하다. 올레마켓웹툰 연재 당시 19금 만화로서는 이례적으로 여성독자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다. 정통 순정만화의 향수를 자극하는 수준급의 작화, 독자의 공감을 자아내는 섬세한 심리묘사로 낯선 소재를 거부감 들지 않게 그려내는 작가의 내공이 엿보인다.



파격적인 소재, 섬세한 묘사

짜릿하지만 한없이 쓸쓸한 관계에 대하여

작품이 시작되자마자 독자들은 남자와 모텔에 들어가는 주인공 우희를 만나게 된다. 함께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정하게 속삭이는 다른 연인들과 달리 남자와 우희는 서먹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오늘 처음 만났고 다시는 볼 일 없는, 어떤 인사도 미소도 필요치 않은 관계다. 우희에게 이름을 물어본 남자가 왜 자신의 이름은 묻지 않냐고 묻자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한다. “몰라도 될 것 같아요.”

작품이 처음 올레마켓에 공개되었을 때 순정만화의 외향과는 다른 파격적인 소재에 독자들은 놀라움을 표했다. 차분하고 단정한 인상으로 직장에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친구들에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려 깊은 친구가 되어주는 주인공이 섹스중독자라는 사실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주인공의 성생활을 묘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녀의 행위 이면에 고여 있는 우울과 불안을 응시한다는 점에 있다. 주인공이 성욕을 느끼고 섹스를 하거나 자위를 하는 일련의 과정은 그녀가 동료들과 도시락을 먹고 퇴근길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사는 장면만큼이나 무미건조하다. 우희는 직장에서 밝게 웃으며 일하고 동료들과 다정하게 대화하지만 집에 돌아와 멍하니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한다. 친구들과 즐거운 내용의 메시지를 주고받는 그녀의 얼굴엔 표정이 없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도 아픈 기억은 여전히 떠나지 않고, 그녀는 극심한 갈증을 느낀다. 포르노를 보며 자위를 하고 낯선 남자들을 만나지만 텅 빈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밤이 지나면 그녀는 다시 담담한 얼굴로 출근을 한다. 직장동료가 호의로 건넨 말에서 부담을 느끼고,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면서도 차마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어 쓸쓸해지고 만다. 너무나 사소하고 그래서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켜켜이 쌓이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떨쳐버릴 수 없는 욕망과 고독, 소통과 관계의 문제를 고찰한다.



대상화되지 않은 여성의 진짜 욕망을 그리다

우희는 끊임없이 섹스에 집착하지만 그녀의 행위는 한 남자에게 휘둘리던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사랑했기 때문에 섹스의 대상으로 이용당하고 원치 않는 행위도 감내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그녀는 파괴적인 섹스를 할지언정 스스로의 욕망에 따른다. 작가는 위태로운 일상을 이어나가는 주인공을 책망하지 않고 그렇다고 그녀에게 면죄부를 주지도 않는다. 작가의 시선은 우희의 성생활을 집요하게 파고들지만, 쾌락뿐만 아니라 혼돈과 공포, 자책까지 고스란히 담아내며 보통 여성이 현실에서 겪는 ‘성’의 맨 얼굴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우희는 분방한 성생활을 즐기는 여성 캐릭터들이 흔히 빠지게 되는 위악과 방종에서 벗어나 있다. 우희는 남성에 의해 대상화된 존재가 아니며 자신의 몸의 주인이다. 우희가 욕망을 채워나가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남성들은 여전히 폭력적이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녀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위태로운 욕망과 고독으로부터 스스로 걸어 나온다. 우희는 ‘함부로 논 여자’도 ‘몸을 버린 여자’도 아니다. 그저 상처받았고 절망했고 잠시 방황하기도 했지만 이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있는 한 사람일 뿐이다. 수많은 영화와 소설 속에서 성적으로 일탈하던 남자주인공들처럼 말이다.